
내가 건식숙성 중인 고깃덩이들을 처음 마주한 것은 2008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에서였다. 호텔 1층에 자리한 스테이크하우스의 입구에는 방 한 칸만 한 통유리 쇼케이스가 설치돼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부위별로 큼직하게 정형된 쇠고기 덩이들이 비닐에 포장도 하지 않은 채 철제 선반에 올려져 방치된 모습이 얼마나 생경하던지. 심지어 어떤 고기는 입맛이 뚝 떨어질 만큼 시커먼 색이었다.
육포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저렇게 큰 고깃덩이를 썩히고 있다니… ‘이곳 라스베이거스에서는 도박과 술에 취한 사람들에게 구더기가 나오는 고기를 팔아 돈을 버나보다’라며 웃었다.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
확고한 음식 장르가 되다
서울에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가 도입되기 시작한 시기는 2009년 말이다.
미국에서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를 즐기던 셰프와 몇몇 외식기업이 선구적으로 건식숙성 방식을 들여왔다. 미국 유명 스테이크하우스의 드라이에이징 방법에 대한 벤치마킹을 기반으로 연구한 끝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은 한국의 건식숙성육은 ‘뉴욕식 스테이크’의 모습으로 소비자들과 만났다. 잘 숙성되어 풍미가 응축된 꽃등심과 채끝등심은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고, 2011년경에는 대중적으로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드라이에이징 숙성육을 선보이는 일부 레스토랑엔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입장조차 불가한 풍경이 일상적이었다.
국내 도입된 지 꼬박 십 년차.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는 육식 마니아라면 한 번쯤은 맛볼 수 있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이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의 역사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어쩌다 뉴욕의 대표적인 요리가 되었을까? 집에서도 건식숙성을 시킬 수 있을까? 숙성 과정에서 성분이 어떻게 변화하고 고기는 왜 부드러워지는 것일까? 이 강렬한 풍미의 스테이크에 잘 어울리는 최적의 와인은 무엇일까?
이제는 맛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다가가,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에 대한 무수한 궁금증을 풀어볼 차례다.

야생의 맛
사람들은 종종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를 야생의 맛이라고 표현한다. 풍부한 감칠맛과 꼬릿한 향이 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를 상기시키는 건조숙성육의 진한향 때문일 것이다. 사실 원시시대에는 사냥한 고기를 바로 소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며칠씩 서늘한 그늘에 두고 공기 중에 노출한 채로 보관하며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고기의 겉 부분은 육포처럼 마르고, 경직되었던 근육도 숙성되며 풍미가 증가했을 것이니 원시적인 야생의 맛이라는 표현이 일리 있다.
17세기 중반 활동한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 ‘도축된 소 Slaughtered Ox ’에서도 건식숙성으로 고기를 즐겼던 중세 사람들의 삶이 엿보인다. 그림엔 도축된 소가 배가 열린 채 어두운 푸줏간에 매달려 있다. 고기를 어둡고 적당히 서늘한 장소에 매달아둠으로써 바닥에 피가 고이는 것을 방지하고 심한 온도나 습도 변화로부터 보호했다.
당시에는 현대적인 냉장 시설처럼 환경을 엄격하게 통제할수 없었기 때문에 곰팡이가 피기도 하고 겉부분이 많이 마르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오염되거나 먹을 수없는 부분은 잘라내고 안쪽의 숙성된 살을 먹었다.
즉 특별한 노하우라기보다는 선택의 여지 없이 건식숙성 방법으로 소비된 것이다.
기술 집약의 스테이크
그렇다면 현대적인 의미의 드라이에이징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야생의 맛이라는 별칭과는 다소 모순적이게도 지금의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는 온도조절 장비와 송풍기, 자외선 살균기 등의 현대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만들어지는 식품이다. 온도는 1~4℃, 습도는 60~80%로 항상성을 유지하며 보편적으로 4주간 숙성시킨다. 레스토랑에 따라 자외선 살균기에 살균한 공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고기 자체를 살균기에 넣어 부패를 미연에 방지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드라이에이징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건식숙성육은 거의 대부분이 스테이크로 소비된다. 이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는 미국, 그중에서도 뉴욕에서 탄생했다. 육류를 메인 요리로 즐기던 유럽인들이 미국 대륙으로 이주하며 스테이크를 메인 요리로 선보이는 ‘스테이크하우스’가 생겼다. 최초의 스테이크하우스는 1827년 뉴욕에 설립된 델모니코스 Delmonico’s 다. 이곳은 정중한 인테리어와 고급스러운 식기로 무장한 프렌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 가까웠다. 지금처럼 뜨거운 접시에 스테이크와 몇 가지 심플한 사이드 디시를 서빙하는 뉴욕 스테이크하우스의 원형은 1887년 피터 루거 Peter Luger 에서 시작된다. 이곳엔 건식숙성육 창고가 갖춰졌고, 미국 프라임 소고기를 선반에 가득 올려 숙성시키며 손님이 오면 큼직한 두께로 정형해 뜨겁게 구워내면서 명성을 얻었다.
세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1970년대 이후 진공포장기술이 개발되며 에이징이 전 세계 소고기 유통의 표준이 되었다.
에이징, 즉 습식숙성 방식은 진공 포장으로 공기의 노출을 전면 차단해 수분 증발을 막아 촉촉한 상태로 숙성시키는 것이다. 공기 중에 노출하지 않아 박테리아로부터 보호되고, 수분의 손실 없이 신선함을 유지하며 육질이 부드러워지므로 위생적이며 담백한 고기 맛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산업적 판단에서도 중량 감소가 없으니 고기를 더많이 판매하며 이윤을 더 많이 남길 수 있었기에 에이징이 대세로 자리 잡은 것. 일반 소매점에서도 습식숙성육이 유통되며 뉴욕의 건식숙성 스테이크는 오히려 더많은 미식가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소고기보다 훨씬 응축된 풍미 덕분이다.
국내에는 2009년 이전까지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를 선보이는 곳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2009년 말에서 2010년 중순 몇몇 선구적인 셰프와 외식기업에 의해 건식숙성 방법이 도입되었다. 수입육인지 한우인지, 도축된 소의 월령이 어느 정도인지, 성별은 무엇인지에 따라 숙성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각 레스토랑에서 최적의 지점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병행되었다. 자본을 갖춘 외식기업들의 노력으로 숙성 센터가 전국 곳곳에 갖춰졌고, 대학과 지역자치단체 등에서도 국내산, 수입산 소를 건식숙성하며 성분의 변화를 분석하는 등 다양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2011년부터는 서울을 중심으로 드라이에이징 스테이크를 선보이는 업장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고 대중적인 관심을 받으며, 일상 속의 친숙한 외식 메뉴로 자리 잡았다.

숙성 중인 등심
건식숙성은 보편적으로 1~4℃로 낮은 온도와 60~80%의 습도를 유지한다. 고깃덩이의 전체 표면이 저온에 노출되어야 균일하게 건조되고, 고인 핏물 등 오염으로 인한 불쾌한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에 건식숙성용 와이어 선반에서 숙성된다. 또한 저장실 내에 보조 환풍기를 설치해 공기 이동을 돕고 있다
.
사진의 숙성고에서는 2일 간격으로 점차 색이 어두워지는 고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주간의 에이징 이후 건식숙성을 시작한다. 최소 3일에서 최대 24일에 이르는 고기 숙성 상태에 따라 고기의 질감과 색이 달라진다.

드라이에이징을 집에서 할 수 있나요?
결론부터 말하면, 가정에서 건식숙성을 제대로 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다.
냉장고에서 숙성에 적합한 온도를 유지한다고 해도 건조하는 과정에서 핏물이 냉장고에 고이거나 미생물이 부패하고 숙성에 적합하지 않은 세균과 곰팡이가 번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 꾸준하게 공기를 통풍시키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건식숙성 기간은 절대적으로 정해진 바는 없지만 최소 열흘 이상 숙성이 되어야 특유의 풍미가 생겨난다. 최대 8일에 이르는 사후경직 시기에 근육 내글리코겐이 젖산으로 바뀌며 산성도가 높아지고 근육이 더욱 뻣뻣해진다.
그러다가 산도가 높아지면 젖산 생성이 중단되며 단백질 분해 효소가 작용해 숙성이 시작된다. 단단하게 경직되었던 근육과 살코기 조직이 연해지고 글루탐산 등의 감칠맛 성분이 풍부하게 생기는 과정이다.
건식숙성은 일반적으로 습식숙성을 거친 뒤 20일 이상 진행되므로 육질이 더욱 부드럽다. 따라서 고기에 혈관처럼 미세하게 분포해 식감을 부드럽게 하는 지방 즉 마블링이 크게 중요치 않게 된다. 덕분에 맛있으면서도 지방 함량은 낮고 올레인산 등의 성분이 높은 단백질 부위를 더 많이 섭취할 수있고, 숙성 과정에서 포화지방산은 감소하고 건강에 좋은 불포화지방산은 증가하므로 건강까지 챙길 수 있다.
건식숙성 과정에서는 매일 평균 1%의 중량이 줄어든다. 즉 30일 드라이에이징한 고기는 크기가 원물의 70%에 불과하지만, 그 풍미는 두 배이상으로 농축되어 치즈나 와인에 비견할 만큼 복합적인 풍미를 보인다.
게다가 겉의 마른 표면을 자르고 나면 가식부는 원물의 50% 중량으로 줄어드니, 귀한 몸이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다. 와인 테이스팅을 하듯 고기의 향을 맡아보면 미네랄리티와 흙향, 고소한 견과류 향미가 올라온다. 맛은 진한 감칠맛이 일품.